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빅토리아 여왕 (문단 편집) === 기타 === * "We are not amused(짐은 즐겁지 않느니라)"[* 번역이 틀린 게 아니라 유럽에서 군주과 [[교황]]은 자신을 복수형으로 지칭한다. 이를 장엄복수형이라고 하며 유럽권에서 일반적이다. 고대 히브리어에서도 [[야훼]]를 언급할 때 신의 존함을 사용하는 것을 신성모독이라 여긴 나머지, 가장 드높여부르는 대명사로 우회해서 언급하고자 장엄복수형을 사용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는 설이 유명한데 그 진위는 불확실하다. [[영국 드라마]] [[닥터후]]에서 빅토리아 여왕을 직접 만난 [[로즈 타일러]]가 계속 이 말을 유도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 어머니였던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켄트 공작부인 빅토리아]]에게 [[모유]]수유를 받았다. 당시 상류층이 [[유모]]를 고용하던 관습을 생각하면, 매우 혁신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여왕은 [[모유]] 수유에 부정적이었으며 딸들이 아기들에게 [[모유]]를 주자 딸들이 [[젖소]]가 되었다고 한탄했다. * 후손들이 태어나면 자신의 이름인 빅토리아와 남편의 이름인 앨버트로 이름 지을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차녀 앨리스 공주의 장녀인 [[헤센의 빅토리아]]를 아꼈던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의 이름을 딴 빅토리아로 이름이 지어졌기 때문이었다. 또한 둘째 증손자 [[조지 6세]]가 태어났을 때에는 앨버트 공의 기일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지만, 부모인 [[조지 5세]]와 [[테크의 메리]]가 아이 이름을 앨버트라고 짓자 그제서야 반색을 하고 예뻐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후손들의 이름에 앨버트나 빅토리아가 들어가는 것에 대해 집착했다. * [[1832년]]부터 죽기 열흘 전까지 [[일기]]를 빼놓지 않고 썼는데 2번에 걸쳐 이를 출판하기도 했다. 지근거리에서 비서 역할을 하던 막내딸 [[영국의 베아트리스(1857)|베아트리스 공주]]는 여왕 타계 이후 일기의 내용을 편집하면서 어머니의 체통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적인 부분은 따로 골라내 남김 없이 불태워버렸다. 그럼에도 현존하는 일기의 양은 꽤 많은 편. [[2012년]] [[5월 24일]], 영국 왕실이 여왕 탄생 193주년을 맞아 [[http://media.daum.net/foreign/newsview?newsid=20120525002703768|여왕이 생전에 쓴 개인 일기 전량에 대한 인터넷 열람 서비스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http://www.queenvictoriasjournals.org/home.do|빅토리아 여왕 일대기 사이트]]에서 볼 수 있다. [[https://m.blog.naver.com/koreabb2014/222258566280|한국어 번역본]] * [[총]]을 구입한 적이 있다. 1838년에 [[제임스 퍼디 & 손즈]]의 권총 한 쌍을 구매했다는 기록이 있다. *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1838년에 [[https://en.wikipedia.org/wiki/The_boy_Jones|토머스 에드워드 존스]]라는 14세 소년이 [[버킹엄 궁전]]에 몰래 들어와 여왕의 편지나 팬티 등을 훔쳐 자신의 바지주머니에 넣어서 빠져나가다 들키는 소란이 있기도 했으나, 놀랍게도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래서인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이 소년은 1840년에도 두 차례나 왕궁에 침입했다. 심지어 첫 침입에서는 들키지도 않고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으나, 둘째 침입에서 여왕의 탈의실 소파 밑에 숨어있다가 여왕의 유모 레첸 여남작에게 들켜서 체포되었다. 이번에는 소년의 아버지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처벌을 받긴 했으나, 놀랍게도 그 내용은 고작 소년원 3개월. 이후에도 정신을 못 차린 이 소년은 소년원에서 출소한 지 2주도 안 되어 1841년에 왕족 주거지에 또 침입했다가 징역 3개월의 처분을 받고 복역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출입금지 상태가 된 버킹엄 궁전에서 배회하다가 해군에 강제 입대되어 복역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노년에는 호주로 건너가 [[퍼스]]의 포고자(Town Crier)로 일했다고 한다. * 1840년 6월 10일 앨버트 공과 함께 모친을 보러 마차에 타고 있던 중[* 이때는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첫딸]]을 임신중이었다.], [[https://en.wikipedia.org/wiki/Edward_Oxford|에드워드 옥스퍼드]]라는 18세 청년에게 암살을 당할 뻔한 적이 있다. [[총]] 두 발을 쐈는데 빗나가거나, 한 발은 본인 주장에 따르면 불발되었다고 한다. 옥스퍼드는 이후 [[오스트레일리아]]로 유배되어 1900년에 사망했다. * 어렸을 때 중병을 앓다가 낫게 해준 의사가 내린 건강 지침을 평생 동안 철칙으로 삼았는데 그건 바로 '''춥게 지낼 것'''. 따뜻함은 사람을 나태하게 만들지만 추위는 정신을 맑게 하고 긴장감을 유지시켜 사람을 최적의 상태로 만든다는 조언을 충실히 지켰는데, 문제는 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 건 다반사였고 비바람이 불 때 산책하길 좋아한 것이다. 물론 여왕 본인은 80살 넘게 건강했지만 여왕을 모시는 주변 사람들의 건강에는 이상이 생겼다. 특히 언제나 여왕 곁에서 지내며 시중을 들던 막내딸 [[영국의 베아트리스(1857)|베아트리스 공주]]는 급기야 30대에 [[류마티스 관절염]]에 걸려 따뜻한 지방으로 요양을 갔는데, 그녀 없이는 못 산다던 여왕은 '''따뜻한 곳에 같이 가는 게 싫어서''' 어쩔 수 없이 베아트리스 공주의 요양을 허락했다. * 미식가였던 것으로 유명해 처음에는 궁정 요리사로 [[프랑스 요리|프랑스 요리사]]를 고용했고 인도 여제가 된 후에는 [[인도 요리|인도인 요리사]]도 데려와 영국에 [[인도 요리]]를 정착시켰다. * [[대영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어간 군주라서 그런지 영연방의 도시들 중 상당수가 여왕의 이름을 따서 빅토리아라 명명했다. * 역대 영국 군주 중 최초로 공식 사진이 남은 인물이기도 한데, 실제로 그녀가 찍은 최초의 사진은 [[1844년]]~[[1845년]] 무렵에 장녀 빅토리아와 같이 찍은 사진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Queen_Victoria#/media/File:Queen_Victoria_the_Princess_Royal_Victoria_c1844-5.png|빅토리아 여왕 최초의 사진]] 다만 그녀는 [[1842년]]에 첫 사진을 찍은 [[프랑스]]의 [[루이필리프 1세]]는 커녕 [[1843년]]에 첫 사진을 찍은 [[미국]]의 [[존 퀸시 애덤스]][* 물론 사진을 찍었을 당시에는 전직 대통령 시점이었다. 참고로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집권하던 시기는 사진의 태동기 시절이라 인물 촬영이 사실상 불가능했다.]보다도 첫 사진을 늦게 남겼다. * [[2011년]] [[11월 1일]] 에든버러에서 열린 경매에서 여왕이 말년에 사용한 비단 속옷이 9,735파운드에 낙찰되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5352963|#]] [[파일:attachment/partition_ching.jpg|width=400]] * 열강이 청나라를 갈라먹기 위해 서로 이전투구를 벌이는 풍자화에서 청나라를 갈라먹으려고 독일의 [[빌헬름 2세]],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와 서로 대립하는 모습으로 나오기도 했다. 저 두 황제는 모두 빅토리아의 손주뻘이기도 한데, 빌헬름 2세는 빅토리아의 장녀이자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장남이기에 외손자이다. 또 니콜라이 2세는 빅토리아의 차녀 [[영국의 앨리스]]의 4녀인 [[헤센의 알릭스]]의 남편이라 외손녀사위인 데다, 어머니 [[덴마크의 다우마]]가 빅토리아의 맏며느리 [[덴마크의 알렉산드라]]의 동생이라[* 즉 빅토리아의 장남 에드워드 7세가 니콜라이 2세의 이모부이다.] 외가 쪽으로는 사돈 집안이기도 했다.[* 또한 니콜라이 2세는 빌헬름 2세와는 서로 7촌 지간이기도 하며 사적으로는 매우 가까웠던 사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콩가루 집안|할머니와 외손자와 외손녀사위가 서로 청나라를 두고 싸우는 꼴.]] 다만 [[청나라]] 땅이 [[대륙의 기상|너무 큰 데다]] 유럽에서 저 멀리 떨어져 있었던 탓에 열강들 입장에서는 아쉽게도(청나라 입장에서는 그나마 다행히도) [[폴란드 분할|폴란드처럼]] 갈라먹지는 못했다.[* 후대에 대놓고 [[중국]]에 대한 합병을 목표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도 같은 이유로 가장 승승장구할 때조차 중국의 동부 해안 지대만 간신히 차지했다.] * 현손녀 [[엘리자베스 2세]]의 손녀 [[베아트리스 엘리자베스 메리|베아트리스 공주]]가 빅토리아 여왕의 젊은 시절 모습과 닮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